`My Hero` 사이언티스트
‘우직한 집념의 연구자’, ‘골리앗을 이긴 다윗’, ‘잭팟을 터트린 사나이’, ‘연구계의 트리플 크라운(기술개발·기술이전·상용화) 달성자’
정용환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자력재료기술개발단장(사진)에 대한 표현들이다.
정 단장은 ‘원자력 소재’ 연구에 25년 동안 매달려 핵연료 기술 중 마지막까지 외국에 의존했던 핵연료 피복관 기술을 완전 국산화, 상용화까지 하는 대업을 완성했다. 방사성 물질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우라늄을 완벽하게 감싸는 피복관 기술 개발로 우리나라는 핵연료 핵심 소재기술 자립을 이뤄냈을 뿐 아니라 핵연료 수출길도 열게 됐다.
출연연 과학자로선 흔치 않게 글로벌 거대기업과의 ‘해외특허 소송’이라는 힘든 난관도 직접 부딪쳐 승리로 이끌었다.핵연료 피복관 개발을 시작한 1997년부터 정 단장과 연구 호흡을 맞춰 온 최병권 기술원은 “초창기 실험공간과 장비가 없고 예산도 넉넉지 않았지만 16년간 단일 연구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리더십과 친화력, 연구에 대한 강한 집념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수많은 힘든 고비에도 마음을 함께 하면서 16년을 동고동락하며 즐겁게 연구할 수 있었다"고 소회했다.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적 꿈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또 과학자가 되는 과정도 남들만큼 순탄치 않았다. 어려서부터 만들고 부수는 것을 워낙 좋아했기에 뛰어난 기술공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당시만 해도 공부는 잘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공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그때 뛰어난 기술공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시절 기술에 대해 많이 배웠다. 졸업 후 취업했지만 학업에 대한 열망 때문에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 직장생활을 잠시 한 후 다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 1985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들어와 과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연구하고 있는 원자력 소재 분야를 소개한다면.
“소재는 원전의 안전성을 좌우하는 ‘최후의 보루’ 같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원전 사고가 나더라도 소재가 우수해 잘 견뎌주면 방사능 유출을 막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원자력 분야에서 논란이 되는 원전 계속운전 여부는 소재의 기술적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원전을 폐쇄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술적 문제를 최종 판단하는 기준이 소재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원자력 소재 연구는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새로운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 원전 안전성 업그레이드와 함께 엄청난 경제적·산업적 파급효과를 얻을 수 있다.”
독일 연구연수가 소재 연구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는데.
“독일 연구연수가 연구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됐다. 1991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장학생으로 독일 원자력기업 ‘지멘스-KWU’에 1년반 가량 연구연수를 갔다. 당시 배치된 연구실에서 원자력 소재 개발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관심이 가서 독일인 동료 연구자에게 ‘나도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기초연구만 하고 논문이나 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 다짐했다. 비록 당시는 소재 분야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었지만, 미래 원자력 기술 자립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기술인 만큼 한국에 돌아가 꼭 연구하겠다고. 그들의 연구 노하우와 시행착오를 지켜보면서 어떻게 하면 연구에 실패하고 성공하는지 배웠다.”
동료들 퇴근 후에도 매일 밤 10시까지 연구실에 남아 공부하던 정 단장은 실험 자료를 우연히 접하고 몰래 읽으면서 독학(?)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중요한 내용을 메모까지 하면서 지식을 쌓았다.
핵연료 피복관은 무엇인가.
“원자로에서 우라늄 핵연료를 감싸고 방사성물질이 외부로 나오지 못하게 막는 1차 방호벽인 동시에 핵분열 연쇄반응으로 발생하는 열을 냉각수에 전달하는 기능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특히 고온·고압 환경에서 잘 견디도록 부식과 변형에 강해야 하고 중성자 흡수성이 낮으면서도 우라늄 핵연료가 효과적으로 연소되도록 고연소도 특성이 필요해 첨단 소재기술 간 융합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독자기술이 없어서 미국 웨스팅하우스나 프랑스 아레바 등에서 매년 수백억원 어치를 수입해 써 왔다.”
기술 완성에 16년이 걸렸다. 연구 과정은 어땠나.
“귀국해서 핵연료 소재연구를 하겠다고 하니 우리 수준으론 불가능하다는 핀잔이 돌아왔다. 선진국도 10~20년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 연구를 하겠다고 했으니 그럴 만했다. 고민 끝에 원자력 중장기 R&D 사업으로 핵연료 소재를 개발하자고 설득해 운 좋게 과제로 채택됐다. 연구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일반 산업소재 개발은 6년이면 됐는데 총 16년이 걸렸다. 실제 소재 개발은 3년 만에 끝냈다. 700여 종의 후보 합금에 대한 기초연구를 토대로 합금 설계, 제조, 평가시험 등 과정을 거쳐 2000년 고성능 지르코늄 합금을 개발한 것이다. 이듬해인 2001년 외국 피복관보다 부식과 변형 저항성이 40% 이상 향상된 ‘하나 피복관’ 시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과정이 더 험난했다. 성능 테스트, 연소시험 등 까다로운 검증과정과 해외 특허소송을 마무리하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16년 연구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어려운 고비가 많았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운도 억세게 좋았다. 1997년 과학기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원자력R&D 사업의 일환으로 과제를 시작했는데, 연구할 인력과 실험실, 실험장비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나와 연구원 한 명, 기술원 한 명으로 시작했다. 장비도 없어 다른 연구실 장비를 빌려 겨우 연구에 착수했다. 처음부터 함께 한 최병권 기술원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 남의 실험장비를 빌려 써야 했는데 최 기술원이 밤에 실험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남들이 다 퇴근한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실험하면 자유롭게 장비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최 기술원은 오후 6시 출근, 오전 9시 퇴근하는,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다. 16년간 함께 호흡을 맞춘 그는 진정한 프로였고 존경스러운 기술 장인이다.”
기술 완성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지르코늄 합금을 개발해 평가한 결과 매우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합금을 시제품으로 만들 곳을 찾지 못했다. 국내 강관회사를 모두 다녔지만 시제품을 만들어도 품질보증은 못 해준다는 말이 돌아왔다. 안전을 담보해야 하는 특성상 품질보증을 못 하는 시제품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해외로 눈을 돌렸지만 한국에 제품을 파는 미국과 유럽 기업들은 우리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일본 기업 중 한 곳에서 가까스로 만들 수 있었다. 다행히 시제품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나왔다. 그 다음은 제품을 상용 원전에 넣어 검증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원전 사업자(한수원)를 쫓아다니며 수없이 설득했지만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제품을 어떻게 상용 원전에 넣어 검증하느냐’며 거절당했다. 외국에서 성능 검증을 받으면 고려하겠다는 한 줄기 희망 섞인 답변을 듣고, 수소문 끝에 노르웨이 할덴 연구용원자로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2004년부터 3년간 연소시험을 거쳐 성능을 재확인하고, 한수원 책임자를 이해시켰다. 그 후 마침내 2007년 영광 원전 1호기에 ‘하나 피복관’을 장전해 5년간 연소시험을 할 수 있었다.”
세계적 원자력 기업으로부터 특허소송을 당했는데.
“기술 개발도 어려웠지만 특허소송은 경험해 보지 않아 더 어려웠다. 국내 원자력 분야 연구자가 특허소송을 당한 것은 내가 유일무이·전무후무할 거다(웃음). 2005년 프랑스 아레바가 어렵게 개발한 피복관 소재 기술에 대해 특허침해 소송이 아닌 ‘특허무효 소송’을 제기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요즘 말로 ‘완전 멘붕’이었다. 2004년 한국, 미국, 유럽, 중국 등에 특허를 등록한 지 얼마 안 돼 벌어져 충격은 더욱 컸다. 아레바는 그때 우리가 성공한 기술을 개발 중이었기 때문에 미래 시장을 지키기 위해 소송을 통해 우리 기술을 무효화시키는 전략을 쓴 것이었다. 국제소송 경험이 없던 터라 암담했고 소송비용도 지원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난감했다. 초기 3년에 걸쳐 지루한 서류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다 2010년 유럽특허청으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다. 기술적 부분은 한국에서 감당했지만, 법적 부분은 현지 변호사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송을 한달 앞두고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기술을 전혀 모르는 현지 변호사를 호텔에서 만나 하루종일 기술을 이해시켰다. 유럽특허청에서 열린 첫 구두심리는 싱겁게 끝났다. 2시간 가량 양쪽 의견이 오간 끝에 심판원들은 우리 특허의 신규성과 진보성을 인정해 무효소송 기각을 결정했다. 우리가 이긴 것이다. 상대방이 항소했지만 한번 내려진 결정은 번복되지 않아 2심에서도 우리가 승리했다. 연구원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해외특허 소송 전문 변리사의 도움을 받아 7년 반에 걸친 피 말린 소송은 일단락됐다.”
연구개발부터 기술이전, 특허소송까지 경험한 소회는.
“30년 연구자 생활 중 25년간 한 분야만 연구하는 기회를 가졌고, 그중 16년은 핵연료 피복관 소재라는 한 우물만 팔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언제나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행복한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자부한다. 출연연에 있기 때문에 한 분야 기술에 오랜 기간 매달릴 수 있었다. 연구 과정에서 정부와 연구소 지원이 없었다면 연구자로서 지금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개발한 핵연료 피복관 기술은 2012년 한전원자력연료에 원자력R&D 사상 최고액인 100억원에 이전됐다. 오는 2016년부터 국내 모든 원전에 적용될 전망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R&D의 ‘알파(α)‘에서 ‘오메가(Ω)‘까지 전 사이클을 경험했고, 7년 반의 특허소송과 기술이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 앞으로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해 더 좋은 원자력 소재 개발에 기여하고 싶다. 현재 미래창조과학부가 전략기술로 연구하고 있는 초고온가스로와 핵융합, 미래원자력시스템 등 지금보다 더 극한 환경에서 견뎌내는 고성능 소재 연구를 기획하고 있다. 소재는 개발에 오랜 기간이 필요하기에 남보다 먼저 20년 후를 내다보는 마음으로 연구에 임해야 한다. 내가 16년 걸렸던 것을 후배들은 10년에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한다면.
“과학기술 분야의 핵심은 과학기술인이다. 과학기술인들은 능력과 자질이 우수한 만큼 정부와 최고 권력자가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면 분명히 좋은 성과로 보답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환경을 조성하고 연구자가 한 우물을 파는 기회를 열어주는 게 필요하다. 우수 연구자에 대한 보상 시스템 등 연구자 중심 과학기술 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결국 한 나라의 과학기술 역량은 우수한 연구 인력과 함께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 의지와 추진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준기 기자
정용환 단장은… 정용환 단장은 핵연료 기술 자립의 핵심으로 남아 있던 핵연료 피복관 원천기술을 확보한 주역이다. 미국과 프랑스 등 원자력 일부 선진국만이 보유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16년간 오로지 핵연료 피복관 국산화에 매달려 상용화에 성공, 국산 기술로 만든 핵연료 피복관을 우리나라 원전에 쓰고 수출까지 하는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그는 연세대에서 재료공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부터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30년간 첨단노심재료개발랩장, 원자력융합기술개발부장, 원자력재료개발부장 등 원자력 재료 분야 요직을 거쳤다. 원자력연구원 첫 영년직 연구원으로 선정됐고, 미래창조과학부 이달의 과학기술자상(2007년), 한빛대상(2013년) 등을 수상했다. 원자력 R&D 사상 최고액인 100억원 기술이전 기록을 세웠고, 국내외 특허 171건과 과학기술논문색인(SCI)급 논문 107편, 학술대회 발표 논문 574편 등 왕성한 연구실적도 갖고 있다.
원문보기: 핵연료 피복관 16년 한우물… 우직한 연구에 수출문 `활짝`